착한 달란트

마태복음25:14-30, 고린도후서6:7-10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착하게 사는 것이 미덕이라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 시대는 옳은 것이 오히려 따분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이 오히려 이용해 먹기 좋은 것이 되고 착한 것이 바보가 되고 순수한 것이 오히려 멍청한 것이 되어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는 것으로 변해버리며 옳지 않는 것이 옳은 것으로 점점 인정되는 현실이 되었다. 또한 무한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몫을 챙겨야 하고 그것이 바로 경쟁에서 이기는 생활방식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착한 사람은 언제나 경쟁력에서 뒤지는 게 당연하게 되어 있다. 사람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바보가 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바보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한다. 속은 줄 모르고 속은 것을 말하는 바보가 있고 속은 줄 알면서 속고 사는 바보가 있다고 본다. 이런 바보는 삶 속에서 위대하게 삶을 살아온다. 이들은 덧없는 세월에서 지나 온 삶에 무게를 두고 의미를 알게 한다.

사람의 내면에는 선과 악의 양면이 존재한다. 참과 거짓, 옳고 그름으로 인생살이가 고달프다. 현재 사람들이 어렸을 때는 착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되려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착한 사람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아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것에만 관심하여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느끼고 그렇게 모두가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착한 사람은 머리 숙인 사람이고 남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으로 인식하여 '그 사람 좋다', '그 사람 순하다' 는 말로 하면서 다시 그를 향하여 그 사람은 '우유부단하다', 그 사람은 '열정이 상실된 사람' '꿈도 비전도 없는 무기력한 사람' 으로 부르게 된다. 이러한 현실의 삶의 풍조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거지가 '좋은 것이 좋아' 하고 생활규범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그 기준에서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가 태반(太半)을 이룬다. 이러한 삶을 '잘 사는 삶' '잘 하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이렇게 적당하게 살면 요령 있게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난 농경사회에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 밑에서 미풍양속이 통했다.

착하다는 개념은 한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고 살았던 소박한 삶으로 바르고 착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오늘의 산업사회에 와서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를 않는다. 지식정보 사회를 사는 삶은 경쟁에 시달리고 문화적 차이와 가치관의 혼돈에서 오는 생활의 변화와 우선적인 삶의 향유를 위해 '경제가 제일'이라는 생활심리가 바르게 착하게 사는 삶의 기준을 흐려 놓고 있는 것이다. '착하다'는 말은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어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마음씨나 행동이)'바르다' '어질다' 하는 마음씨는 '선(善)하다' 는 '착하다.'는 뜻이다. 인간의 삶은 선(善,good)과 악(惡, bad) 혹은 옳음(right)과 그름(wrong)의 기준이 사물의 기원과 그 본성 그리고 하나님에 의한 삶의 목표가 그 이상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삶의 기준을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33년의 삶을 사신 예수의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 가를 알아야 한다. 자기중심의 삶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까지 보여 주셨다. 삶은 어느 누구나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삶이다. 예수는 내 삶의 기준이요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은 그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이를 예수는 삶으로 보여 주시고 말씀으로 이를 알게 하신 것이었다. 한 예를 들면 우리가 지키는 세상의 법도 사회법이 그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사회의 법에는 민법, 국법, 국제법, 양심법, 자연법, 신법 등이 있다. 여기에 하위의 법이 상급의 법에 위배되면 천륜을 어긴다 하여 잘못된 법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늘의 법(神法)을 따르는 것이면 하위의 모든 법은 이미 지키는 것이 된다는 것이 법을 아는 기본적인 상식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도 사는 사람' 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생활은 선(善)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이다. '착할 善'을 '잘할 善'으로 바꾸어 놓는 삶이 되었다. 옛 사람들이 말하든 권선징악(勸善懲惡)같은 것은 오늘의 사회에서 멀어진지가 오래 되었다. 만일 선으로 착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그를 바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게 산다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게 살면 그를 일컬어 바보라고 한다. 삶에는 그 중심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착한 것을 바르게 보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삶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삶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아야 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알아야 삶의 가치를 알게 된다. 이것은 바르게 착하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다. 바르게 살지 못하면 삶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과 그 삶을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으며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그 대답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과는 상관치 않고 경제를 우선순위로 두는 나라는 국민총생산이나 소득 등으로 삶의 수치기준이 선진국인양 잘 사는 나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무역으로 인한 흑자나 그 나라의 환경수준, 그리고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가 잘 사는 나라로 인정하는 추세가 바꾸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예컨대 예전에는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 군사적으로나 무역으로 강한 나라를 세계적으로 우세하게 보는 경향이었으나 이제는 스위스, 핀란드, 네덜란드처럼 환경이 좋고 국민들의 삶의 질이 바르고 착하게 사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로 그 인식이 바꾸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서태평양솔로몬 제도와 뉴질랜드 사이에 위치해 있는 바누아투라는 나라를 보면 집도 없고 차도 없고 돈벌이도 없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이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는 때 묻지 않는 순수하고 소박한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개발도상국들이 국민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잘살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수준에 대한 전반적인 기대치가 낮고 그러다 보니 경쟁구도가 생기지 않는데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행복 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게 한다. 행복은 물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니라' 예수의 말씀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는 사람의 일상생활의 삶에서 그 소재를 찾는다. 달란트 비유도 마태는 당시 사회 상황에서 악덕지주의 횡포와 부익부 빈익빈의 생활을 비유의 소재로 다루고 누가는 실재의 역사를 배경으로 소재를 삼는다. 고로 마태는 예수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일을 맡기신 것과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재림하여 오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요 누가는 예수의 왕권을 거부하는 자들이 받을 심판을 비유의 소재로 함을 알게 한다. 달란트의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무슨 기적적이거나 열광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는 시간 선상에서 순간순간 삶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청지기의 사명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한탕주의에 만연된 삶에서는 기적과 같은 횡재나 투기와 같은 기회주의가 아니라 순간순간을 최선의 삶을 살아 영원을 얻는 삶인 것이다.

여기 우리가 아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는 그의 책자에서 세계의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지금 우리 교육은 경쟁의식만을 독려하고 있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지 않고 뒤틀린 교육 현실에서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공부만 하도록 내몰리고 있는 현실에서 반 총장의 지나온 삶에서 자기의 삶을 알게 한다. 그의 학창 시절에 공부하는 이유와 간하기에 없는 시간에도 꾸준히 시간을 활용하여 그의 노력은 열과 성을 다하는 그의 학창시절을 알게 한다. 그는 50여 년 전 영어 학습 환경이 그 당시에는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영어 공부에 열정을 보인 반기문의 공부 이야기는 파다하게 소문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그가 유엔 사무총장이 되기까지의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그는 욕심 없이 얌전한 편이었는데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일에는 꼼꼼히 챙겨 열정을 가지고 스스로 영어를 외우는 일에 습관을 길러 장래의 꿈을 잃지 않았고 그의 학교생활은 청소년 적십자단 활동으로 봉사, 예술제, 연수 등 해외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백악관 견학 후 케네디 대통령에게서 '장래 희망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고 '외교관이 되는 겁니다.' 유창하게 영어로 대답했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우며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며 매순간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의 생활 습성이 됨에 주목해 보게 하는 것이다. 1970년 외무고시 3기에 차석으로 합격하여 연수를 마치고 해외 근무지로 인도를 지원하자 많은 이들에게 의외의 지원을 알게 하며 여기서 그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 되는 의지를 펼치게 된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가 장성한 사람이 되기까지 충북 음성에서 출생하여 고등학교까지 충주에서 자라면서 공부와 가난의 생활에서 촘촘히 익히는 최선을 다하는 습성 때문이라 한다.

그의 솔선수범하고 성실한 태도 및 그의 주변의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그의 성품은 그를 초고속 성장과 성숙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철저한 도덕적 삶을 견지해 왔다. 욕심이 없고 검소하기도 하지만 자기 삶의 관리가 철저히 했음을 안다. 예컨대 그는 '선한 사람이 최후에는 승리한다.'는 좌우명을 내세우고 있기도 한다. 사실로 그가 유엔 사무총장이 된 배경은 사무총장 선거 결과에서 보아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를 응원하게 된 동기가 그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그와 같이 했던 많은 인연들이 그의 지원군이 되어 주었고 어떤 일에든지 '최선을 다하는' 반기문의 태도를 높이 평가받게 됨을 아는 것이다.

본 비유의 교훈에서는 달란트의 분배의 이유를 알게 한다. 각각 그 재능대로 5,2,1달란트를 맡기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그 재능의 능력대로 일을 맡기신다는 것은 자기 처지의 분수를 알게 하고 달란트 비유의 원칙은 주인이 주인의 의도대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각각 재능대로 주신다. 재능대로 주신 것은 주님이 그들의 가능성과 능력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의 달란트를 종들이 어떻게 관리 했는가를 알게 한다. 또한 이윤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그 책임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한 달란트의 종은 땅에 그대로 묻어 두고 여기에 그의 달란트를 전혀 활용하지 못한 점을 알게 한다.

이로 인해 달란트의 비유는 여기에 따르는 상급이 있다. 그 상급은 '착하다'. '작은 일'에 노력을 했다함을 알고 '착하고 충성된 종' 이라 일컫는다. 본래 '충성'이란 말은 마음의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이라는 말이지만 충(忠)은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기준을 뜻하는 말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뜻하기도 한다. 본 '달란트 비유'(마25:14-30)의 앞과 뒤의 연결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그 뜻을 어떻게 우리가 실현하느냐 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본 비유의 앞구절(마25:1-13)은 '열 처녀의 비유'가 있고 뒷구절(25:31-46)에 '양과 염소에 대한 비유'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교훈으로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그 때가 올 것을 기다리라는 준비된 마음을 알게 하기에 나에게 맡겨진 재능을 최선을 다해 활용하라는 지침이요 양과 염소는 한 무리에 섞여 있으면서 비슷하게 보이지만 예수께서는 거짓과 참을 구별해 내신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비유의 중심은 얼마의 이윤을 얻었는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착하게, 최선을 다하여 책임을 가지고 일 했느냐를 물으심에 유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일'에 '충성'했다는 말로 그를 '착하다'고 한다. 충성이라는 말은 지극히 작은 일에도 소흘하지 않고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뜻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 사명을 알게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단편들은 서민적인 사람들의 삶에서 사랑에 대한 의무와 책임, 우정, 일의 신성함 등의 주제를 쉽고 아름답게 표현하여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여기에 <바보 이반>은 우둔하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한 <바보 이반>이 타고난 성실성(최선)을 바탕으로 야비하고 욕심 많은 두 형제들을 제치고 삶의 진지함을 민화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음에 깊은 감동을 준다. 성실하고 착한 <바보 이반>과 권력욕과 소유욕을 대표하는 세묜과 타라스, 이 세 형제가 악마와 벌이는 한판 승부가 벌어지는 이야기로 권력과 돈을 탐하는 두 형과 달리 이반은 쉽게 이러한 악마와 마귀의 꾐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바보 이반>은 그의 우직함과 성실함으로 그들에게 소박한 삶의 우월성을 알게 한다. 그는 인간이 지닌 욕심과 집착을 문학적으로 극명하게 형상화한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좋은 평가를 인정받는다. 대충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그려보고 싶어 하는 사람의 참된 모습으로 인물 중의 하나가 '바보' 라는 것임을 안다. '벙어리 삼룡이'가 그렇고 노들담의 꼽추 "콰찌모또" 가 그렇고 '돈키호테'를 알게 된다. 현실적으로 보면 못나고 어리석고 사람구실 못하게 생겼지만 그의 내심 감추어진 따뜻한 인간성과 온순한 마음을 일구어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삶은 우리에게 믿음의 삶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삶으로 보여주는 삶이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고 사는 삶은 세상잣대로 보면 예수 믿고 '바보'가 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다. 다메섹의 하늘의 계시된 사건은 평생 그의 삶을 통해 하늘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삶 자체였다. 그는 예수를 핍박하는 자였다.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으며 그는 유일하게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고 율법학자였다. 그리고 바리세파의 최고의 경지에 있는 율법주의자였다. 그 시대에 비쳐진 예수는 사이비 교주처럼 유대인들에게는 각인 되어 있었다. 그가 로마를 버리고 예수에게로 왔다는 사실은 그를 '바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전에 지키든 율법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으며 세상이 보는 예수의 바보 같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예수의 삶을 잘 알고 실천한 사람은 바울뿐임을 알게 된다. 바울은 바보처럼 사는 예수의 형극의 길, 십자가의 길을 고스란히 따르는 주의 종임을 알게 한다. 소명에 붙잡혀 사는 삶은 사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가 없음을 몸소 증언하는 삶으로 '주님 중심으로 사는 삶'을 보여 주었다. '나 중심의 삶' 을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바꾸는 전환의 모습을 바울에게서 보는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실제로 달란트가 무엇이 어떻게 '착한 달란트' 인지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마음, 목숨,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교훈을 아는 것이다. 나 받은 달란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아야 하는 당위적인 청지기 사명을 알 게하고 하나님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고스란히 땅에 묻어 둘 수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착한 달란트' 는 고후6:7-10

{{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 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