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무엇이 보이느냐?
창세기 3:22-24, 마가8:22-38, 로마서1:18-20
2010년 8월 22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무엇이 보이느냐?' 라는 말은 예수께서 벳새다에서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눈을 치유하신 후에 "무엇이 보이느냐?" 고 하신 말씀이다. 여기에 눈 먼 사람은 하늘을 쳐다 보며 하는 말이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이 보는 세상의 모든 것 그 무엇이든지 다 보이는 것이다. 이는 창조가 긍정적인 이해로 창조 자체가 살아 있는 것 모두가 다 움직이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창조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눈으로 보아서 관찰할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나 사물과 현상을 이루고 있는 사상(事象 events)의 정상적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일상생활에서 창조된 대상물로 시간, 우연, 그리고 다양한 자연과정의 결과로 생긴 대상물을 보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창조의 대상은 모두가 움직인다. 생명이 살아있다는 것은 곧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은 생명인 우리가 창조자의 창조행위를 보지 않고서도 그 창조의 증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여 알게 한다. 예컨데 눈(雪snow)송이는 우리로 하여금 놀랄 만큼 그 모양이 아름다운 디자인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양 또한 복잡하고 놀랍다. 눈송이 하나하나는 섭씨 영도 이하의 상태에서 물의 분자가 자연적으로 무엇을 행함으로 아름다운 6각형으로 디자인 되어 결과물로 눈꽃송이가 만들어진다. 패션의 디자인들은 눈송이 패턴을 본따 모자이크 타일을 만들지만 눈송이 보다는 품위가 떨어진 것을 알게 한다. 이같은 패턴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생각하면서 눈송이 같이 자연발생 체계가 전체의 성질에서 부분의 성질로 연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보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0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고 하는 것이다. 요컨데 창조에서 보면 시간, 우연, 자연과정이 만들어 낸 체계의 질서는 '외부의 결정'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이 멀어 창조의 신비를 보고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진행이 잘못되어 병이 생기면 제조자의 원리를 알아야 고치게 되고 치유함을 받을 수있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제조자와 사용자와의 약속에서 이루어 지는 현상임을 알게 된다.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하기에 질서가 우선되어야 원리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 아버지는 유일하신 신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영원 전부터 홀로 계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창조되지 않으신 분이시며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창조되지 않는 신의 생명을 혼자만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이 생명은 신성한 생명이며 그 생명을 가지고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된 피조자나 피조물은 영원하지 못한다. 이것은 생명이 자기 소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된 생명이 신성한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이 되면 창조된 생명은 신성해지며 또 영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성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 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아버지의 생명과 함께 하도록 잠시 창조된 육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시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그 생명나무로 오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창조된 육체의 죽음을 당하신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아버지의 그
신성한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예수의 성육신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은 생명을 얻기 위한 구원의 역사이다. 구원의 생명은 십자가로 죽으셔서 음부에 내려 가시고 위로 솟구치는 생명의 부활을 알게 한다. 이는 한 알의 씨앗이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에 묻히어 삶이 흙과 엉키어야 하고 그 땅 속에서 생명이 솟아오르는 이치를 터득케 하는 것이다. 나무의 성장은 이것을 간증한다. 본문에서 눈 먼 사람에게 예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는 말씀에 곧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움직이는 생명이 보인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1:1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고 한 경험은 삶에서 얻어 낸 신앙생활에 유의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 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바는 곧 생명의 관리자로 창조와 질서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땅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보는 뜻도 마음도 잃지 않아야 함을 알게 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분명히 달랐다. 바울은 예수를 핍박했고 대제사장 가야바로 부터 허락서를 들고 그리스도인들을 잡기위해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도중 빛을 보고 실명(失明)한다. 이어 예수께서 말씀하시를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물으시고 바울이 '누구세요?' 하고 물으니 예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니라" 하신다. 이것은 삶의 태도로 보아 죽음의 길로 향하는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보게 하며 다마스커스사건 이후 땅에 머무는 삶에서 하늘의 사람으로서 하늘을 보는 살아있는 삶으로 그 삶의 자리를 하늘. 땅. 사람을 함께 엮어내는 그리스도교의 삶을 보이는 것이다.
이 땅의 인류는 지난 200년 동안 땅에서 살아온 삶에서 삶의 모순으로 위기와 갈등에 서 있음을 본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지구의 생명체는 크게 손상을 입어 인류는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 이것은 땅에 것만 보고 살아온 인간 역사의 과거지사(過去之事)를 보게 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공해, 자연 자원의 낭비가 긴장을 만들어 냈고 자원고갈, 오염, 생명과 그 종의 멸절, 산림과 자원, 습지와 갯벌의 상실은 지구의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으며 최근 기후변화, 태풍, 해일 등으로 모든 생명은 훼손되고 인간의 무지와 오만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경제와 개발의 논리에 밀려 인간의 삶에 생명의 위기로 지구촌은 하늘의 재앙을 겪어야만 한다. 이렇게 인류는 산업화 과정에서 하나님의 생명 환경을 파괴하여 인류생명의 파멸이라는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본다.
여기서 우리는 '벳새다의 눈먼 사람의 치유' 에서 이를 알게 한다. 마가복음에서 눈먼 사람을 고치신 사건은 눈(eye)에 대한 언급으로 '본다(see)' 라는 단어를 썼으며 귀(ear)에 대한 언급으로 '들음(hear)' 의 단어를 쓰는 것은 마가복음의 중심주제가 보고 들음으로 '깨달음(understanding)' 에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으로 눈먼 사람이 점진적으로 개안 되어짐을 보여 줌으로서 눈먼 사람이 영안이 열려 살아있는 온 세상을 창조의 신비함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문은 "무엇이 보이느냐?" 의 질문에서 바로 이어서 29절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로 그 반응(이해)해 보이시는 것이다. 땅의 삶에만 치우치는 삶에 항상 불안과 위험을 달고 살던 눈먼 사람으로 오늘과 같은 처지의 인생을 보게 하고 바로 인도할 수 있는 분이 누구임을 보게 하여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길을 보게 하는 것이며 진리를 깨닫고 생명을 얻어 광명을 보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눈이 멀어도 보지도 못하고 귀가 멀어도 듣지 못한 체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러한 삶이 생활화 되어 있는 군상들에게 예수는 다시 우리 눈이 사물을 정확히 되도록 사실을 보는 안각이 되도록 "무엇이 보이느냐?" 고 말씀 하신다. 요컨데 흔히 사람들은 사물을 보는 안각이 자기중심적인데 맞추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즉 성공한 사람을 높이고 실패한 사람을 무시한다. 힘있는 사람은 존경하고 힘없는 사람은 무시한다. 똑똑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바보같이 똑똑하지 못하면 멸시한다. 그러나 예수가 주목하는 눈은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이요 존경해야 할 사람은 불의한 자가 아니라 의로운 자이다. 많이 가진 부자가 아니라 가지지 못한 가난한자에 관심을 갖는다. 꽤부리는 영악한 사람이 아니라 삶에 무게를 실고 묵묵히 행하는 자에게 예수의 안각이 향한다. 그리하여 예수는 겸손을 알게하고 섬김의 삶을 보여 주신다. 그리하여 높은 자리보다 낮은 자리에 거하신다. 쉽고 빠른 약삭보다는 바보처럼 사려가 깊은 배려를 하며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예수가 무슨 메시지로 우리에게 "무엇이 보이느냐?" 라고 하신가? 하고 생각해 본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참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삶은 가치이다. 삶이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 되어서는 아니되며 삶은 참으로 창조자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점에 유의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의 사람들이 풍요로운 시대에 살면서도 절망과 공허와 불안에 허덕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본다. 예수는 이러한 눈먼 사람을 향하여 "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으신다. '나무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보나이다'는 '생명"이 보이는 것을 보게 한다.
나무를 통해 세상 모든 살아있는 생명의 근원과 삶의 과정을 살포시 알게 한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신비와 존엄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나무가 어디서 왔는 지 어떤 씨에서 작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그 과정을 통해 작은 꽃 나무 하나라도 그 근원이 반드시 있음과 객체에게 존재의 의미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과 더불어 나누는 삶을 담아 내면서 초라해 보이는 냉이꽃으로 부터 천년을 사는 소나무에 이르기 까지 현대인이 살면서 놓치기 쉬운 자연의 숭고한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나무에게서 묵묵히 자라며 모진 바람에서도 그 생명은 살아 움직이며 자라나는 것임을 보게 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한다. 우리 생명은 우주의 큰 생명에 속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내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생명은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생명을 어둡게 쓸 것 인가?
밝게 쓸 것인가? 이것은 자기결단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생명이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함으로 겸손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한다.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자기의 가진 것이 자기의 생명을 지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 하신다. 자기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는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소유의 사람인가? 존재의 사람인가?도 알게 한다. 이는 자기 몸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창조함을 받아 하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인가를 알게 한다. 사람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근원적인 소유의 욕구를 존재의 욕구로 바꾸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 진리, 생명이라' 고 하신다. 이것은 무슨 일이든지 주를 위해 사는 예수의 삶이 곧 중심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탐욕으로 눈이 멀어 소중한 생명을 잃은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탐욕으로 부터 자기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탐욕의 실체가 사탄이기 때문에 이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뿐인 것이다. 이것을 믿는 믿음으로 나는 죽고 예수의 삶을 따르려면 하늘을 쳐다 보며 사는 삶이 생명의 삶인 것이다. 생명은 대지를 호흡하여 공기를 마시며 코로 숨을 쉰다. 생명은 죽음의 과정이다. 죽음없는 생명은 없다. 이것이 죽어야 산다는 말씀을 알게 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태도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죽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죽을 때 까지 살겠다는 삶이 있고 어떤 사람은 죽어도 살겠다는 사람이 있다. 죽음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창조의 이치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어진다. 다만 삶과 죽음에도 하나님과의 약속이 실현되어야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김으로 사는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하늘을 보고 하늘의 중심을 믿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 죽어도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하심을 깨닫게 한다. 땅만 보고 걸어가는 우리에게 하늘 한번 쳐다 볼 수있는 안각의 방향이 "무엇이 보이느냐?" 의 해답은 땅만 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